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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기

<미나리(스티븐 연,한예리,윤여정,정이삭 감독)>, 뿌리 내리는 삶에 대하여

by 마인드TV 2025.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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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나리〉는 이민자 가족의 고단한 삶을 그려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단순한 가족 드라마가 아니다. 이 영화는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족이란 무엇으로 이어져 있는가’를 잔잔하지만 강인하게 묻는다. 격렬한 장면 하나 없이 조용히 흘러가지만, 영화가 끝나고 난 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오래 진동하는 울림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미나리〉를 ‘한국 이민자의 미국 정착기’라는 좁은 틀에 넣어 설명한다. 물론 그 맥락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전 세계 관객에게 보편적인 감동을 준 이유는, 이민이라는 상황을 뛰어넘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버거우면서도 아름다운 일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 아버지 제이콥 — ‘꿈을 꾸는 사람’이 지닌 위험과 숭고함

제이콥(스티븐 연)은 실패를 경험해본 사람이다. 부모로서의 책임과 개인의 꿈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자신만의 농장을 꾸리겠다는 의지를 놓지 않는다. 그는 결국 농장이라는 ‘삶의 답’을 찾아 헤매는 사람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제이콥이 단순히 성공을 원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는 점이다. 이 질문은 많은 중년에게도 깊이 와닿는다.


우리는 늘 누군가가 정해준 기준 속에서 살아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정의해야 한다. 실패하더라도 “이건 내 선택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제이콥의 고집스러운 태도는 이런 자존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꿈을 쫓는 사람의 뒤편에서, 가족들은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진다. 아내 모니카는 늘 불안하고, 아이들은 혼란스럽다. 꿈은 종종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피어나지만, 꿈을 포기하는 것 역시 또 다른 상처가 된다. 그래서 〈미나리〉는 ‘정답’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살아간다는 건 언제나 누군가의 불안을 안고 가는 일’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 모니카 — 눈물로 버티는 사람들의 얼굴

모니카는 늘 눈물의 기색을 지닌 사람이다. 그녀는 이민 이후 한 번도 ‘안전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남편의 농장은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는 꿈이고, 낯선 땅에서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은 늘 그녀의 가슴을 짓누른다. 모니카의 불안은 이민자들의 현실 그 자체다. 그들은 미래를 믿어야 하지만, 믿을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모니카가 흘리는 눈물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이민자의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요한 지점은, 모니카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족을 지키려 한다는 점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고, 극장과 병원에서 ‘성별 판독가’로 일하며 가계를 돕는다. 삶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가 붙잡는 것은 ‘현실’이다. 제이콥이 꿈으로 버틴다면, 모니카는 현실로 버틴다. 이 상반된 태도가 부부 사이의 갈등을 만들지만, 동시에 그들은 서로에게 절실히 필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 아이들 — 낯선 세계에서 두려움과 호기심을 배우다

딸 앤과 아들 데이비드는 이민 생활에 대한 부모의 고민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나이지만, 그들은 어른보다 훨씬 더 빠르게 이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간다. 특히 심장질환을 지닌 데이비드는 영화의 중요한 시선이다.

 

그는 연약하지만, 동시에 호기심이 많고 귀엽고 솔직하다. 어른들이 숨기고 싶은 진실을 아이는 직감적으로 느껴버린다. 그래서 데이비드의 눈은 이 영화에서 가장 투명하다. 아이들은 언제나 가장 먼저 적응하고 가장 늦게 상처받는다. 그런 면에서 〈미나리〉는 어른들의 삶을 아이들의 눈높이와 섞어 부모의 꿈이 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담담하게 보여준다.

■ 할머니 순자 — ‘한국적 생명력’의 상징

세계 관객이 가장 사랑한 캐릭터는 단연 순자 할머니다. 그녀는 한국적 ‘정(情)’과 ‘투박한 사랑’의 결정체다. 고상한 멘트 하나 없지만, 그녀가 건네는 말과 행동은 모두 진심이다. 순자는 아이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사람이다. 그녀가 가져온 고춧가루, 마늘, 미나리 씨앗은 그 가족이 비록 타지에 있지만 뿌리는 잃지 않고 있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순자의 진짜 가치는 마지막 장면에서 드러난다. 그녀가 실수로 불을 내는 바람에 농장은 타버리고, 가족의 꿈도 함께 무너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 장면은 멸망이 아니라 ‘정화의 순간’이다. 순자의 실수가 오히려 가족을 다시 하나로 만든다. 그동안 갈라져 있던 마음이 불을 통해 다 드러나고, 이후 가족은 비로소 서로의 절망과 희망을 이해하게 된다.

■ 미나리 — 가난하고 낮은 곳에서 자라는 생명력

영화 제목인 ‘미나리’는 이 작품의 완전한 상징이다. 미나리는 좋은 땅이 아니라 물가, 습지, 버려진 자리에서 더 잘 자란다. 한 번 심으면 이듬해 더 풍성하게 자라며, 환경에 강하고 생명력이 질기다. 이민자 가족의 삶이 바로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버려진 자리처럼 보이는 땅에서 그들은 다시 삶을 시작한다. 조건은 최악이지만 그 속에서 희망의 뿌리가 길게 내려간다.

 

영화 마지막, 손자와 함께 심어둔 미나리가 무럭무럭 자라난 모습을 본 순자는 말한다.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이 대사는 가족의 서사를 압축한 문장이다. 그들이 어떤 땅에 서 있든, 어떤 절망을 겪든, 결국 뿌리 내릴 수 있다는 희망의 언어다.

■ 〈미나리〉가 남긴 질문 — “우리는 어디에서 자랐는가?”

〈미나리〉는 미나리가 자라는 습지처럼, 가족이란 가장 낮고, 가장 때로는 외롭고, 가장 힘든 자리가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자리는 가장 강해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어떤 땅에서 자라나왔는가?”
“당신은 지금도 자랄 수 있는 토양을 가지고 있는가?”
“당신의 가족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가?”

 

이 질문을 곱씹다 보면, 내 삶을 붙들고 있는 ‘미나리’ 같은 존재가 떠오르게 된다.

■ 삶은 결국, 낮은 데서 자란다

〈미나리〉는 화려한 드라마도, 강렬한 갈등도 없다. 하지만 우리 삶의 진짜 얼굴은 그런 조용한 장면 속에 숨어 있다. 가난해도, 실패해도, 길을 잃어도 다시 자라나는 생명력. 그것은 소리 없이 자라는 미나리처럼,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이 영화가 오래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이민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미나리처럼 낮은 곳에서 다시 자라야 하는 인생의 순간을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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